202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순절 메시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부활절맞이를 시작하며 지금은 ‘괴로운 결단’의 때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한복음 12장 27절)
기독교 전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재림은 지구생명공동체의 구원과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과정을 보여주는 특별한 때,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로 점철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존재 자체가 구원과 해방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구현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때를 성찰하며, 회개와 갱신을 통해 값비싼 친교와 공동의 증언의 자리로 나아가는 영적 순례와 신앙적 결단의 때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죽음의 잔을 앞에 두고 고뇌에 찬 결단의 때를 통과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과 해방의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과 같은 자신의 운명 앞에 괴로움을 토로했던 역사적 예수의 현존은, 지금 여기 ‘괴로운 결단’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를 수난 받는 사랑으로 보듬고 계십니다.
지구생명공동체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위기는 반복되어 왔지만, 지금 당면한 코로나19 위기와 기후위기, 정의의 상실과 인간성 파괴의 위기, 주권재민의 민주 역사를 퇴행시키는 권력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생명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과 해방의 손길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때”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 위기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을 구현하는 손과 발이 되어야 하는 위기의 현실은 우리에게 심히 ‘괴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내 것’을 차지하고자 하는 탐욕의 ‘금 긋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위기의 극복은 이웃과 자연을 위해 나의 경계를 열어주는 ‘괴로운 결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오늘의 살림과 미래세대의 지속가능성을 염려한다면, 생명의 모판인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요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만인에게 베푸시는 일용할 양식의 은총을 위해 자신의 녹슨 곳간을 비우고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정의롭고자 한다면,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고 편법으로 공적 자산을 탈취한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고,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회복적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경받고자 한다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크고자 한다면 남을 섬겨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받고자 한다면,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환대하고,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끝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괴로운 결단’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행동해야 할 “이 때”입니다.
올해 사순절은 극한 대립 속에서 퇴행하고 있는 대통령선거로 인해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때가 될 것입니다. 총체적 생명위기의 시대에 대한민국의 대전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 위에 서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하나님의 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시대의 십자가를 놓으신 동시에 우리의 바른 선택과 결단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괴로운 결단’을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분단과 전쟁 대신에 평화공존과 화해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공권력이 주권자인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특정 집단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동하도록 내어주는 대신에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권재민의 민주정신을 실체화하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무속 비선정치가 지닌 주술적 판단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며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대신에 민주적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성숙한 시민민주주의를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불평등의 근본원인인 탐욕의 시장경제체제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대신에 상생의 생명경제를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며 자본의 신 앞에 절하는 대신에 인간의 존엄과 자연에의 경외를 모든 사회구조와 일상의 삶 속에 구체화하는 평등한 생명세상을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심히 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이 때”를 결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신앙적 결단과 선택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사순절이 되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 이 ‘괴로운 결단’을 위하여 “이 때”에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의 선한 이웃이 있습니다. 지금은 ‘괴로운 결단’의 때입니다.
2022년 2월 2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이 홍 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