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7일차
                                                                ‘마침’
                 하나님의 계획과 내 의지가 만나는 그곳, 그리고 사탄의 속임이 있는 그 순간

제목: 선한 의지에 대한 선물
룻기 4:1 보아스가 성문 위 회관으로 올라가서 앉아 있는데, 그가 말하던,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바로 그 사람이 마침 지나가고 있었다. 보아스가 그에게 “여보시오, 이리로 좀 올라와서 앉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올라와서 앉았다.

룻이 비록 과부이고,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여성이 다른 이의 잠자리 옆에 있다는 것은 비난 당할 위험이 큰 사건이었습니다. (예. 다윗의 둘째 아들 암논이 배다른 누이였던 다말을 취하고 버린 것처럼) 그 남성이 욕망을 채우고, 여성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러한 룻의 행동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시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오히려 룻을 위로하고, 자신이 기업 무를 자(고엘)의 의무을 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그 의무를 실행합니다.

그러한 의지를 가진 보아스의 선한 의지에 하나님은 그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을 마침 지나가게 하십니다. 보아스는 친족과 보증인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고엘의 의무를 포기하자, 자신이 그 고엘의 의무를 지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율법)은 친족이 죽으면 그의 가족들을 부양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법에 부담을 느낍니다. 권리를 가져도 책임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법이 있어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며, 아전인수격 해석을 통해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려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무책임에 비난은커녕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너가 책임졌다면 너도 어려워지거나, 망했을 것이라 충고합니다. 당신은 책임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신 삶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의무를 지는 것은 자신만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돈과 사람들간의 이해관계도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길거리에 있었지만, 제사장과 레위인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를 돕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의 의무보다 앞서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시간적, 공간적, 물질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 주고, 도와줍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은 더 선하게 반응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보아스는 고엘이 되어 룻과 나오미를 부양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비록 자신의 생애는 보지 못했으나, 다윗의 증조부가 되었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으로 영원히 칭찬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룻과 나오미, 강도 만난 사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의지를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더 고귀한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무지개 뜨는 언덕에서 이주헌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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