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코흘리개 였던 때였다. 아빠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 1층의 한 방으로 들어 갔다. 거기에는 내 또래와 형 누나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따라 불렀고, 인사를 하러 앞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그 때부터 나는 교회학교에 속하였다. 아빠가 사우디로 일하러 가셨을 때는 엄마 손 잡고, 동생과 같이 교회에 갔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갔고, 오전 9시에 시작하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2학년이었던 동생 손 잡고, 버스를 타고 둘이서 교회를 갔다. 늦게까지 교회에 있다가 둘이서 돌아오고 그랬는데…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는 못할 것 같은데, 그 때는 그랬다.
교회가 참 좋았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들을 데리고, 교회를 출발해서 자유공원을 지나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전도행진을 했고, 땀 뻘뻘 흘리면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같이 놀아 주었다.
때로는 선생님 집에 놀러가서 라면을 먹어도 그 때는 그렇게 그게 좋았다. 휴대폰도 없는 시대에 부모님은 그런 선생님들을 믿었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그렇게 놀았다.
중학생이 되자, 교회 문학의 밤을 위해 밤 늦게까지 교회 남아서 준비했고, 추운 겨울 갈탄을 스스로 넣으면서 시린 발과 손을 녹이기도 했다.
주일에는 공간을 찾아서 성경공불를 했는데, 그 때, 빨간 스토브가 약간의 온기를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부터 호빵이 나왔던 것 같다.
지난 금요일 무지개교회의 레인보우 어린이 속회가 시작이 되었다. 감사하게 김선미 집사님이 이사를 하고 나서 그 집이 어린이속회 공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아내가 전화했다. “목사님! 오시면서 버거킹에서 불고기 버거를 사가지고 오세요. 아이들하고, 약속했어요. 나은이는 햄버거 안먹고 너겟을 먹으니 너겟으로 준비해 주시고요.”
그 사이에 아이들고 속회하는 사진이 보내져 왔다. 아이들은 책상에 앉아서 어린이 속회를 하는데, 참 즐거워 보였다.
‘딩동’ 햄버거를 들고, 방문은 하는데, 집 주인 우리 ‘하나’ 가 ‘목사님!’ ‘산’과 ‘강’이가 ‘아빠!’ 하고 불렀다. 햄버거만 전해 주고 가려고 하는데, 하나가 목사님! 들어오셔서 우리 공부하는 보세요. 하고 반겨 주었다.
‘하랑’이와 ‘나은’이가 무엇인가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좋았다. 너무 좋았다. 아이들과 잠깐 인사하고 나와서 교회로 향했다.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 낼 책임이 우리에게 있었다.
내 코흘리개 시절, 교회학교 선생님의 마음이 그랬을 것 같다. 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십자가 앞에 선다. 눈을 잠시 감고 기도하며, 구한다.
‘우리 무지개교회가 더 많은 영혼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