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대화하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난 당신과 살면서 때로는 실망도 많이 했지만, 당신이 개척을 준비할 때, 낮에는 교회 개척 자리를 알아보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이 가정에 대해서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이 가장 좋았어요. 이 사람은 가정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구나! 책임감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근래 많은 일들이 우리 나라 땅에 벌어지고 있다. 세계잼버리, 오송지하차도, 서이초사건, 이태원 참사까지 정말 쉴새없이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국민들이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해 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나는 책임감을 가진 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고, 자꾸만 그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전가하니, 아랫사람들도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고 계속 문제를 전가 하다보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책임감을 강조할 때, 우리는 소속의식을 느낀다. 소속의식은 공동체를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사회의 모든 곳에서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모두 책임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책임감에 대해서, 말로만 할 뿐 실제로는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책임을 지면 여러 가지 불이익들이 뒤따라 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러사람들이 잘못한 문제에 대해 한 사람이 책임지겠다고 나서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해 고마워 할까?
그러면 참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책임을 진 사람을 오히려 공격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공격한다.
특히, 힘없고, 연약한 곳에서 더욱 그렇다. 성공하면 내 덕이요. 실패하면 너 때문이다. 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의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번 새만금 세계잼버리는 그 와중에 일어난 것이었다. 책임자가 있으나, 책임지지 않는 나라는 참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아니더라도 내 자녀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근본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관심을 잃어버린 채, 전도만이 살길이라 외치지만 성경은 한치도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떠나지 않았다.
성경은 이 책임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구속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의 약속을 놓치지 않고 영원한 구속으로 함께하셨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많은 교회는 이웃사랑에 대해서 이웃을 구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이웃사랑은 더 넓게 해석되어야 한다. 사회가 가지고 병폐적 문제에 대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1930년대 독일 기독교는 히틀러의 나치가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 성소수자, 공산주의자, 정치범, 포로등을 1700만명을 학살 할 때, 독일교회는 침묵했다. 그들은 ‘나치 정권에 협조하면 국내선교도 원활할 것이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제공받아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는 직, 간접적으로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교역자들이 전적으로 오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교회의 양심이며 순교자인 ‘본 회퍼’목사가 아니었다면 독일교회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백교회를 결성하였으며, 히틀러 암살에 관여하다가 1945년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독일이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되었다.
책임을 떠미는 사회에서 오늘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전 천주교회의 구호가 생각이 난다. ‘내 탓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