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결과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와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영국의 식민지와 세계 2차대전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에게 각각 독립국가를 약속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불리는 가나안땅이라 불리는 이곳으로 유대인들은 오랜 유랑과 박해(홀로코스트)를 피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고,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 싸워 나갔고,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의 무슬림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의 과정은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박해 받은 것은 원주민이었던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그 중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위치한 자치정부로 이스라엘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서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가자지구는 우리나라의 세종시만한 크기로 약 200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로부터 모든 것이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통제당하는 고통을 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난과 고통, 통제는 극에 달했고, 이스라엘의 이러한 폭압적인 정책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테러로 맞섰고,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전투기를 이용해서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런 과정속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평화가 오기도 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주도하였고, 그들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 청년의 총탄에 라빈 총리가 죽음으로 끝이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증오는 평화를 금방 무너트리는 홍수로 변해, 다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늘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참상으로 이 모든 것의 연장선입니다. 증오의 결과물들은 많은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습니다.

사실, 이번 사태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극우정치가 한몫하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가인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사법적 위기에 몰리면서 그는 반헌법적인 일들을 통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그 지지율을 위해 외부의 적인 팔레스타인에 여러 가지 자극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특히, 무슬림들의 명절 라마단 시기에 이슬람교의 3대성지 중 하나인 알 아크사 모스트에 이스라엘 무장경찰을 난입시켜서 사람들을 잡아가면서, 팔레스타인들과 무슬림들의 분노를 조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노 결과물들이 이번 하마스의 급습이었습니다. 하마스는 수천발의 로켓탄을 발사하였고, 그 사이 이스라엘 정착촌과 축제 현장에 들어가서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납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에 대한 댓가로 하마스와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폭탄들로 가자지구 폭격하며 인명 살상하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수천의 희생자가 나왔고, 수만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쪽 다 그 증오 속에서 서로 상처 받고, 결국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을 응원하고, 어떤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응원합니다. 서로가 잘못했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친이스라엘을 선택합니다. 첫 번째는 그들은 성서의 주인공이고, 두 번째는 똑똑하고 강한 민족성, 세 번째는 우리 민족의 상처을 투영시키는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나쁜 민족’이라고 쉽게 결론 내려 버립니다. 물론 반대로 이스라엘을 상대적으로 나쁘게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땅도, 지금 극우정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극우정치인들을 기용하여 중요한 국방, 안보, 외교 쪽으로 배치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휴전선 근처에서는 무력충돌을 일으키는 군사 훈련을 하지 말자는 9.19 남북군사합의를 파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전쟁으로 진압하겠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나 진배없게 됩니다. 또, 계속적으로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불의한 자들이 정치적 이득을 보기 위해 국민들을 희생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하마스 극우정치가들이 그렇게 하듯 말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세대 전에 전쟁으로 인해서 증오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세대가 지나면서 그 증오는 희석되어 갔지만, 오해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해는 미움으로 변화고, 미움은 다툼으로 변화고, 다툼은 상처로 상처는 증오로 갑니다. 남과 북이 오해의 소지를 줄여야 합니다.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닌, 이해를 통한 평화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일구는 자리에서 헌신할 때, 우리는 평화의 사도이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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